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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감동·기타

아나타한(Anatahan) 섬의 여왕벌 사건 (32명의 남자와 한 여자의 7년 섬 생활)

by 이글이글 202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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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과 사이판이 있는 마리아나 제도에는 '아나타한'이라는 섬이 있습니다.(아래 지도 참조)

과거 태평양 전쟁 이후 이 섬에서 한 여자와 32명의 남자가 함께 살게 되면서 여자를 둘러싼 다툼과 알 수 없는 사망사고까지 잇따라 발생했던 기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명 아나타한 섬의 여왕벌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나 제도의 섬들과 아나타한 섬
마리아나 제도의 섬들과 아나타한 섬
아나타한의 여왕벌 '히가 카즈코'
아나타한의 여왕벌 '히가 카즈코'

 

일본 해군에 의해 징발되어 1944년 5월 24일 요코하마항을 출항한 어선들(헤이스케 마루, 아케보노 마루, 에비스 마루, 카이호우 마루)은 사이판 부근으로 남하하던 중 미군 전투기에 발견되어 공격을 받아 난파되었으며, 이로 인해 해군 10명과 민간인 선원 21명이 아나타한 섬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아나타한 섬에서는 전쟁 이전부터 일본 기업에 의해 야자수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섬에는 일본인 농원 기술원 주임과 그의 부하직원, 그리고 부하직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 이렇게 3명의 일본인과 70여 명 정도의 원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부하직원은 파간 섬으로 여동생을 데리러 나간 이후 소식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섬에 갑작스럽게 31명의 일본인 남성들이 나타나자, 일본인 기술원 주임과 부하직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는 음식을 나누어주며 도와주었으나, 너무 많은 인원으로 식량은 금세 동이 나 버렸고, 이에 남자들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사냥을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32명의 남자 1명의 여자)

 

그러던 어느 날 폭풍우 속에 파도에 휩쓸린 1명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31명의 남자 1명의 여자)

 

이들이 섬에 도착한 후 약 1년 여가 지났을 무렵, 1945년 7월 중순에서 약 1개월 간 아나타한 섬은 거의 매일 공습을 받고 있었고 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미군이 데리고 가거나 탈출하여 결국 섬에는 일본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전쟁이 끝났지만, 이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이들은, 9월 중순 미군이 섬에 도착하여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섬에 있는 사람들도 얼른 항복하고 배에 탑승하라"라고 외치는 확성기 소리에 섬 곳곳으로 도망 다닐 뿐이었습니다.

 

이후 공습은 없어지고 가끔씩 미군이 섬에 찾아오기도 했으나 이내 곧 철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섬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고군분투해야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풍부한 섬의 자연환경 덕분에 나중에는 직접 재배한 코코넛으로 술을 만들어 먹고 파티를 열기도 하는 등 차츰 섬 생활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점차 섬의 유일한 홍일점인 '히가 카즈코'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기술원 주임과 카즈코가 부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러한 경향은 더욱 노골적으로 심해졌습니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카즈코는 기술원 주임과 동거하기 시작했으나, 질투심이 많은 기술원 주임은 카즈코가 다른 남자와 말을 주고받는다는 이유로 자주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1946년 2월 어선 헤이스케 마루의 선장이 피로로 급사하였습니다. (30명의 남자 1명의 여자)

 

그러던 중 1946년 8월, 섬에 접근하는 미군을 피해 산으로 대피했다가 산속에 추락해있는 미 육군 B-29 폭격기의 잔해를 발견하였는데, 여기서 2명의 남자가 고장 난 권총 3정과 실탄 70발을 발견합니다. 이들은 고장 난 권총 3자루를 분해하여 2 정의 권총을 완성시켰습니다. 이때부터 비극은 본격화됩니다.

 

얼마 후 이 권총 2인조와 사이가 좋지 않던 한 남자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목격자는 2인조뿐이었고,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진술하였으나 진실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29명의 남자 1명의 여자)

 

이 무렵 농원 기술원의 집착에 질린 카즈코는 다른 한 남자와 눈이 맞아 산으로 도망치는 일이 있었으나, 너무 좁은 섬이라 간단히 발각되어 이내 농원 기술원에게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후 권총 2인조는 카즈코에게 더욱 노골적이 되었고, 농원 기술원과 권총 2인조, 그리고 카즈코 4명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1947년 가을, 결국 사이가 멀어진 권총 2인조 중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을 사살합니다. (28명의 남자 1명의 여자)

 

이후 신변에 위험을 느낀 기술원은 1948년 권총남에게 카즈코를 양보하고 물러납니다. 그런데 3개월 뒤 권총남은 행방불명되었고, 농원 기술원과 카즈코는 권총남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27명의 남자 1명의 여자)

하지만 수영을 잘하는 권총남이 물에 빠졌다는 점도 이상하거니와, 목격자는 농원 기술원과 카즈코뿐이었고 그 사건 이후로 기술원과 카즈코의 사이가 좋아진 점 등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 반년 뒤에는 기술원도 사망했습니다. 권총남이 죽은 뒤 그의 권총을 갖게 된 '신'권총남과 카즈코는 기술원이 식중독으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26명의 남자 1명의 여자)

그러자 권총을 가진 자가 카즈코도 갖는다는 암묵적인 불문율이 섬 전체에 퍼지게 되면서 섬에는 일촉즉발의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어 카이호우 마루 갑판장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아케보노 마루 갑판장도 식중독으로 죽었습니다. (24명의 남자 1명의 여자)

 

심지어 최고 권력자였던 신권총남까지 큰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였으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23명의 남자 1명의 여자)

 

이렇게 작은 섬에서 한 여자를 두고 남자들의 의문의 죽음이 이어졌고, 살인인지 사고인지도 명확하게 조사할 방법도 없었던 그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고 연장자가 중재를 하게 됩니다. 카즈코가 직접 남편을 고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들 축복하여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에 카즈코는 과거 함께 산으로 도망갔었던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했고, 나머지 모두가 축하해주었습니다. 또한 2개의 권총은 모두 부수어 바닷속에 버렸습니다. 

 

1949년 가을, 미군은 항목을 권유하는 전단을 계속해서 뿌렸으나 이들은 여전히 패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미군의 배가 섬에 다가왔을 때, 모두 도망가는 남자들과 달리 카즈코만 혼자서 미군의 배로 다가가 섬에서 탈출했습니다. (구출 당시 카즈코의 나이는 28살)

히가 카즈코 구출당시 사진
히가 카즈코 구출당시 사진

 

1950년 8월, 카즈코와 섬에서 결혼했다가 혼자 남겨진 남자가 병사했고, 1951년 1월 아케보노 마루의 선장이 손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섬에 남은 남자는 21명이 되었습니다. 

 

1951년 6월, 가족들로부터 편지를 가지고 온 배에 군인 출신 1명이 탑승하여 섬을 떠났고, 남은 20명도 다음에 미군이 오면 항복하여 섬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6월 30일 섬에 남아있던 나머지 20명의 남성들도 미군 배에 탑승하여 섬을 떠났습니다. 

아나타한 섬의 사람들

 

이후 이 기묘한 이야기는 일본에서 1953년 카즈코 본인이 직접 주연한 B급 엽기영화 '아나타한 섬의 진상은 이렇다'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미국 영화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에 의해 "The Saga of Anatahan(1953)"으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The Saga of Anatahan 주연 "네기시 아케미"
The Saga of Anatahan 주연 "네기시 아케미"
영화 The Saga of Anatahan 포스터
영화 The Saga of Anatahan 포스터
영화 The Saga of Anatahan의 한장면
영화 The Saga of Anatahan의 한장면

 

일본 전역에서 주목을 받고 '여왕벌', '아나타한의 독부' 등으로 불리며 각종 매스컴 등에 이용당하던 그녀는 점차 세간에서 잊혀 조용히 지내다 1974년 52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별세했다고 합니다.

히가 카즈코 본인 사진
히가 카즈코 본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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